사람들은 가깝지 않을수록 더 친절한 경향을 보인다. 가깝지 않다 보니 상대가 마음을 배려하고 원하는 것도 참으면서 의견을 조율한다. 갈등을 만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서로 다르다는 것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실망하는 일도 별로 없다.
반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낸다. 서로를 잘 알기에 오히려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크게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낯선 이에게 길을 친철히 알려주고 회사 사람들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술자리를 하는 사람들이 정작 집에 가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다. 심지어 가족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가 "오늘 하루는 어땠어?" "힘들지?"라고 위로해 주기를 바란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도 힘든것은 마찬가지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상대방은 나와 다른 욕구를 지닌 나와 엄연히 다른 존재다. 그런데도 둘 사이의 경계를 무시하고 한 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상대에게 태울 수 없는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그가 나만을 위해 존재하길 바라고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 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과 욕구를 채워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처음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예의를 지키고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면서 조심스레 접근한다. 그러다 만남이 반복될수록 '편한 사이'가 되어 부끄러운 모습들도 서서히 드러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받아들여 주고 좋아해주면 우리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기뻐하면서 한층 성장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 기쁨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상대가 내 본습에 실망해 언제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그래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끝없는 데스트를 시작하게 된다. 나만 봐달라고 내 얘기에 웃어 달라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 달라고 끊임없이 조르는 것이다. 말 안해도 내가 뭘 생각하고 어떤 상태인지 알아 달라고 요구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상한다. 그렇게 상대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채워줘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처음 만났을 때의 조심스러움과 배려는 사라지고 사랑이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것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가까운 만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무심코 휘두른 손이 상대를 할퀴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관계가 틀어져 마음이 상하면 우리는 으레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최선을 다한 나에 비해 상대방은 별로 애쓴 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쌓여 있던 불만이 폭발하여 상대방에게 ""너 때문이야"라는 비난을 퍼붓기에 이른다.
남 탓, 내 탓을 하며 싸우지 않는 방법은 없는 걸까? 결국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고통스러운 관계를 견디는 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아니다. 방법이 있다. 서로 너무 큰 상처를 입혀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면 된다.
거리를 두는 것은 아예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 버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이치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슬프지만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고치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즉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 않고 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베이지 사범대학 교수 위단이 쓴 <논어심득>에는 이런말이 있다. 꽃은 활짝 피고 나면 시들 일만 남게 되고 달은 꽉 차게 되면 기울 일밖에 남지 않는다. 활짝 피기 전이나 꽉 차기 전에는 그래도 마음속에 기대와 동경이 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관계도 모두 이와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확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두 사람이 친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영역을 함부로 침법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자신을 열고 상대를 이해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친밀함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흔히 가까운 사이가 되면 "우리 사이에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하며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까울수록 더 신경 쓰고 아껴야 한다. 상대가 모든 걸 받아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지 말고 자존심을 할퀼 수 있는 말은 피하며 신뢰를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가족은 눈물로 걷는 인생의 길목에서 가장 오래 가장 멀리까지 배웅해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꼭 가족이 아니어도 언제든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도 묵묵히 걸어갈 힘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친밀함이란 외로운 이 행성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방치하지 말고 꾸준히 물을 주고 가꾸어 나가야 한다. 그 꽃이야말로 우리의 보잘것 없는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